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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슈마허는 F1 사상 최고의 전적을 남기고, 정밀 기계와 같은 드라이빙 테크닉을 팬들의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 내는 한편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고 무리한 주행으로 비판되는 일도 종종있었습니다. 2013 년 사고 이후부터 공식석상에서 슈마허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한때 '붉은 황제'로 불리며, F1 사상 최고의 전적을 남긴 마이클 슈마허, 사이보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확고 영화같은 드라이빙 테크닉을 자랑하는 F1 레이서 슈마허의 영광과 가장아끼는 차의 정보, 비극의 기록, 그리고 사고후 근황에 대해 정리했습니다.





미하엘 슈마허는 최다 우승 91회, 챔피언타이틀 7번등 F1의 주요 기록을 경신한 F1 레이서입니다. 특히 드라이빙 테크닉의 정확한 움직임때문에 터미네이터, 사이보그등의 별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별명은 물론 첫째는 슈마허의 드라이빙 테크닉에 대한 칭찬이 담겨 있습니다. 

한편 슈마허의 냉철하고 성격과 더불어 승리를 추구하는 자세에 대한 비판과 야유가 포함되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최고의 전적을 남긴 F1 레이서 미하엘 슈마허의 영광과 애호 하는 차 그리고 비극의 사고 후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미하엘 슈마허 (Michael Schumacher) 1969 년 1 월 3 일 태어난 독일인입니다. 

독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F1 드라이버즈 챔피언이 6살 연하의 동생 랄프 슈마허도 윌리엄스등에 소속되어 6승을 올린 전 F1 드라이버였습니다. 

최다 우승 91 회, 챔피언타이틀 획득 7번 등 F1의 주요 기록을 갱신하는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는 명실공히 세계최고의 넘버원 레이서중 한사람입니다.

성을 줄인 슈미 (Schumi) 마이클 영어 읽기의 마이클라는 애칭 외에 그는 냉철하고 정확한 운전에서 사이보그로 불렸던시기도 있습니다. 


이러한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슈마허의 전적과 기술을 칭찬하는 한편 너무나 무모한 운전이나 무리한 현역 복귀로 물의를 빚는등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쾰른 근교의 퓌 르트 헬 뮬 하임에서 벽돌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난 슈마허는 4살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모터를 갖춘 페달 자동차에 열중합니다. 

이윽고 애마에서 거리를 달리는 마이클이 전봇대에 충돌 한 것을 계기로 걱정한 아버지는 슈마허를 카트장에 데려갑니다. 

이렇게 미하엘 슈마허는 레이스의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그 후 아버지가 장바구니 장의 관리인과 렌탈 카트 가게의 직업에 대해 어머니는 카트장 식사 스탠드에서 일하게되고, 마이클은 점점 카트의 세계로 나아가갑니다.

아시다시피 모터 스포츠는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입니다. 카트 경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슈마허의 가정은 아들이 카트 레이스를 할 정도로 여유있는 집안이 아니었고 낡은 타이어를 주워 사용한 적도 있었다고합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슈마허가 레이스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은사인 위르겐 더크의 지원과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장비가 핸디캡이 될 수 없었던 슈마허 자신의 재능과 불굴 투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슈마허는 레이스를 계속하기 위하여 자동차 대리점에 입사해 정비사 자격을 취득합니다. 


1988년인 19세 때는 주니어 포뮬러로 승격 한 슈마허는 WTS 레이싱의 소유자 윌리 웨버의 눈에 띄어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경주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F3 데뷔 후에도 꾸준히 승리를 거듭 국제 경기에서도 연속 우승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슈마허는 형사 사건을 일으킨 조던 팀의 드라이버 베르트랑 가쇼의 대역으로서 제 11 전 벨기에 GP와 함께 팀에서 F1에 첫 출전을 합니다. F1에 데뷔하면서 난 코스로 정평이 나있는 스파 프랑코 르샹 서킷에서 예선 7위를 차지하고 결승에서는 0 주년 은퇴에 끝났지만 대형 신인으로 주목 받고 베네통에 가입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던 소송을 제기하지만 결국 로베르토 모레노와 슈마허의 트레이드로 이적이 성립합니다. 이 소동이 국제 자동차 연맹 (FIA)의 계약 승인위원회 (Contracts Recognition Board, CRB) 설립으로 이어집니다. 


이적 후 첫 이탈리아 GP 5위를 해 첫 포인트를 적립하고 이어지는 2차전도 6위 입상과 활약을 계속하지만 제 15전 일본 GP 예선에서는 큰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 후에도 사고없이 레이스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실은 척추 몇 군데가 손상된 것이 몇 년 후 검사에서 발견됐습니다. 


1992 년 (23 세) 랭킹 3위, 1993년(24 세) 랭킹4위 및 경력을 거듭해 1994 년 슈마허는 F1 드라이버의 정점에 도달합니다.

1994 년 개막전 브라질 GP에서 우승 한 기세로, 파죽의 개막 4 연승을 달성 한 슈마허는 전반 8 전중 6 승하여 랭킹 2위인 데이먼 힐에 37 포인트의 차이로 따라 붙였습니다. 그 해의 챔피언 가장 유력한 후보로 주목 된 아일톤 세나는 3차전 산 마리노 GP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슈마허가 후반전에 많은 벌금을 받아 타이틀 경쟁은 슈마허의 1 점 리드에서 최종전 호주 GP까지간 슈마허는 간신히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인 1995년 시즌 17전 중 9승을 거둔 시즌 최다승을 기록해 2 년 연속 드라이버즈 챔피언에 빛납니다.

2년 연속 드라이버즈 타이틀 시즌 최다승 기록을 손에 넣은 1994 년, 1995 년, 슈마허에게는 빅이어이자 어두운 그림자의 해이기도합니다.

1994년 영국 GP에서 스타트를 지시하는 검은 깃발을 따르지 않고 25,000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고, 또한 FIA 세계 모터 스포츠 평의회에 의해 영국 GP의 실격 이어 2경기 출장 정지 및 베네통 팀에 대한 50 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베네통의 항소에 따라 청문회까지 3경주 (독일 GP, 헝가리 GP 벨기에 GP)에 출전이 인정되었고 벨기에 GP에서 1위로 골인했지만, 스키드 블록의 규정 위반에 따라 실격처리가 됩니다. 


그 청문회의 결정에 의해 영국 GP의 실격 2경기 출장 정지가 적용되었습니다. 

최종전 호주 GP는 양자가 접촉하고 함께 리타이어라는 결과로 끝 슈마허는 첫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손에 쥐게 됩니다.

1996 년 전년 시즌 중반 베네통과의 계약 갱신을 하지 않는 것을 표명한 슈마허는 오랫동안 제목에서 멀어지게 되자 명문 페라리로 자동차 번호 1번을 내걸고 이적합니다. 




그리고 슈마허는 페라리로 이적후 8 년 만에 당초 목표로 내건 3 회 우승을 차지합니다. 베네통에서 이적한 로스 브라운과 로리 반의 힘으로 전략의 레벨과 시스템 개발을 진행한 결과 시즌 5승을 올리며 2위 빌을 1 % 포인트 앞서 최종전 유럽 GP에 안착하게 됩니다. 


이 레이스에서 타이틀 경쟁을 할 빌과의 접촉 과정 외에 따돌림 받고 리타이어가되어 뷔루누부에 역전되어 타이틀을 놓치게 됩니다. 


이때 FIA는 슈마허의 중대한 과실 판정을 하게 되고 1997 년 챔피언 쉽에서 슈마허를 제외해 드라이버즈 랭킹 2위도 말소당하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습니다.

페라리의 왕좌 탈환을 감행한 1998 년은 시스템 성능과 팀과 파트너의 백업으로 슈마허는 순조롭게 포인트를 올리고 최고의 드라이버였던 미카 핫키넨과 치열한 싸움을 전개합니다. 


하지만 제 15전 룩셈부르크 GP 최종전 일본 GP에서 연속으로 미카 핫키넨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하며 2년 연속 최종전에서 타이틀을 놓쳤습니다.

시즌 6 차전 캐나다 GP에서 은퇴하고 핫키넨게  8점이 뒤진 상태에서 제 8전 영국 GP를 맞이했습니다. 


시작에 뒤쳐져 있던 슈마허는 스토우 코너에 접근할때 감속하지 못해 코스 이외의 타이어 장애물에 들이 박게 됩니다. 모노코크 내부에 다리를 강타당해 오른발 경골과 비골 골절에 의해 슈마허 경력사상 첫 부상으로 결장했습니다. 


이후 페라리는 사고 원인을 리어 브레이크 캘리퍼의 문제라고 발표하고 있습지만 블랙 박스의 기록에서는 충돌시의 속도는 시속 107km였고 기계는 순간적으로 50G가 걸려 있었다고합니다. 


슈마허 자신도 그 당시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을 정도의 대형 사고였습니다. 6경기나 결장한후 말레이시아 GP에서 슈마허는 세컨드 드라이버로 복귀하며 자신의 대역으로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경쟁하게된 어바인을 지원합니다. 


어바인은 우승하지 못했지만 1983 년 이후 처음으로 페라리의 컨스트럭터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개막 3연승을 포함해 8경기 5승의 하이 페이스로 포인트 리드를 구축에도 제 9 전 이후 3연속 리타이어를 당해 핫키넨과의 치열한 타이틀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제16 경기 일본 GP에서의 매치 레이스 우승을 차지한 슈마허는 3번째 페라리 소속 드라이버로는  21 년만의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이탈리아 GP에서 41승째를 거두게 됩니다. 2001년 개막전의 공동 기자 회견에서 슈마허는 GP 드라이버로 자신이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하며, 향후의 승리는 자신의 성장이 아니라 페라리의 진화, 성장을 의미한다고 발언하고 있습니다. 


드라이버로 성숙기를 맞이한 슈마허는 2001년, 2002 년과 압도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특히 2002년 한때 은퇴없이 전체 레이스 시상대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2005년 36세가 된 슈마허는 새로운 규제 대응 시스템과 타이어가 잘 작동하지 않게되어 고전하는 한해가 되었습니다.



2006년 개막전 바레인 GP는 폴 투 윈의 시즌 첫 우승을 장식합니다. 시즌 종반을 향하던 제 15전 이탈리아 GP 후 공식 기자 회견에서 2006 년 시즌 마지막으로 자신의 F1 드라이버 은퇴를 표명했습니다. 


이어 제 16전 중국 GP에서 빗속의 레이스를 우승하고 F1의 마지막 승리를 거두어 91승을 달성하게 됩니다. 은퇴 후에는 관리자 입장에서 페라리의 F1에 관련된 다른 유럽 GP의 발표자와 모국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스페인에서 개최된 이벤트에서 두카티의 MotoGP 바이크를 탄 것을 계기로 2륜 레이스에 흥미를 가져 2008 년 3월에 이탈리아의 작은 레이스에서 데뷔해 4위로 입상을 하기도 합니다. 

같은 해 5월에도 독일의 슈퍼 바이크 챔피언십에 출전 제 1 열은 28위로 완주를 하고 제 2 열은 전도 리타이어에 끝났습니다. 2007 년 11 월, 12 월에 테스트 드라이버로 약 1년 만에 F1 머신의 스티어링을 잡고 2일 연속으로 톱 타임을 마크해 관계자들을 놀라게했습니다. 

그 후에도 테스트 드라이버로 종종 F2008에 타고 있었습니다. 2007 년 시즌에는 장바구니 이벤트에 참가하여 종합 우승을 했습니다. 

2009 년 헝가리 GP 공식 예선 주행 중에 부상당한 펠리페 마사를 대신하여 유럽 GP에서 F1에 복귀한다고 발표되지만, 오토바이 경주에서 전도했을 때의 부상으로 인해 복귀를 포기했습니다. 2009 년 12 월 23 일 슈마허가 메르세데스와 3 년 계약을 맺고 메르세데스 그랑프리에서 F1에 복귀하는 것이 발표되었습니다. 


2010 년 개막전에서 부진이 이어 슈마허는 해고되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슈마허는 끝까지 스스로를 믿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제 16전 일본 GP 파이널에서 가까스로 놀라운 주행을 보이며 부활의 조짐을 보여줬지만 계속되는 레이스에서도 결과가 나오지 않아 F1에서 경력 최초로 무승을 불명예를 얻게됩니다. 72 포인트 랭킹 9위라는 주위의 기대를 꺾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시리즈 막판 제 15 전 일본 GP에서 2012년 두 번째 은퇴소식을 발표했습니다. 

두 번째 은퇴 레이스에서 최종전 브라질 GP에서 7위 입상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던 2013 년 12 월 29 일 프랑스 그르노블 메리 벨 리조트 스키를 즐기고 있던 슈마허는 스키장 밖으로 스키를 타다가 전복되어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게 됩니다. 

그 때의 속도는 시속 20km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착용한 헬멧이 깨질 정도의 충격이었다고합니다. 


긴급 이송된 현지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뇌좌상과 뇌부종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슈마허는 뇌의 전문 수술팀이 기다리는 그르노블 대학 부속 병원으로 이송됩니다.

슈마허는 2차례의 수술을 거쳐 위기 상황을 벗어나 회복을 기다리기위한 인공적 혼수 상태에 놓이게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수술후 상태가 안정 될 때 2 ~ 3 주 정도가 일반적이며 슈마허의 경우도 병세가 안정될 때까지만 유지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사고 1개월 후 2014 년 1 월 30 일 슈마허의 주치의가 슈마허를 인공적인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3월에는 자력으로 호흡을 하고 4월에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고 대화에 반응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그 후 6 월 15 일에 스위스 로잔 대학 병원에 같은 해 11 월 19 일에 마침내 제네바의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현재 슈마허는 제네바의 집에서 요양과 재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슈마허의 개인 정보 보호는 가족의 의향으로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어 현재의 근황이 속보로 보도되는 것은 아닙니다. 


2016년 11월 베네통 페라리에서 슈마허와 팀을 이룬 로스 브라운은 슈마허의 근황에 대해 억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슈마허 가족의 심정과 사생활을 존중하고 분별없는 보도를 막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사업가이기도 한 코리나 부인과 2 명의 아이들이 투병하는 슈마허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최첨단의 치료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대저택이나 자가용, 슈마허의 애마 페라리 F2000 등을 매각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슈마허의 애마를 소개합니다. 페라리 캘리포니아는 페라리 최초의 쿠페 컨버터블 2 플러스 2 시트의 모델로서 2008 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또 페라리 앤초 페라리, 부가티EB110SS를 즐겨 타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슈마허는 바이크 또한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할리 데이비슨이 페라리 레드라는 슈마허를 위한 특별 모델을 출시 한 적이 있습니다. 슈마허가 4번째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획득했을 때의 승리수를 기념하여 51 대 한정으로 생산되었습니다. 


슈마허의 애마인 할리 VRSC 패밀리는 할리 데이비슨 유일한 수냉 DOHC 엔진 탑재 차량으로 등장한 바이크입니다. 이상 F1 레이서 미하엘 슈마허에 대해 정리했습니다. 같은시기에 활약하고 비극적 인 사고를 당한 아일톤 세나와 비교하면 슈마허는 항상 칭찬과 비판 혼재된 시선이 쏠리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밀 기계에 비유되는 스타일로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세의 뒷면에는 슈마허의 순수함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실 이런 경주 스타일은 개인적으로 선호합니다. 


무리한 현역 복귀로 비판을 받았지만 슈마허라는 사람은 서킷 이외에는 사는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까 생각해 진심으로 응원했습니다. 그 사고로부터 3 년이 지난 지금 한 사람의 팬으로서 미하엘 슈마허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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